사화란 선비들이 화를 입은 사건을 사화라고 하는데 여기서 선비는 사림파를 말한다.조선에 당시 조정에는 훈구파와 사림파의 두 정치세력이 있었는데 훈구파는 많은 재물과 권력을 차지하고 막강한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이에 반해 사림파는 고려말 역성혁명에 반대 하면서 시골로 숨어 버렸던 온건파 신진 사류의 제자 들로서 조선의 정치가 안정되자 이들은 과거를 통해 조정에 등장했다.이들의 세력은 어느 틈인가 무시못할 세력이 되어 훈구파와 경쟁하게 되었는데 훈구파와 사림파가 치열한 다툼을 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사화이다.사화는 연산군 때부터 명종 때까지 네 번이나 일어났다.연산군 10년에 무오사화에 이어 갑자사화가 일어났다.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는 성종의 후궁이었다가 왕비가 되어 연산군을 낳은 사람이다 그런데 질투가..
영조의 임금의 나이가 80에 이르러 사도세자의 아들 세손이 대리청정을 하게 되었다.이 때에 세손의 외할아버지인 홍봉한이 영의정으로 있었고 동생인 홍인한 또한 정승자리에 있어 홍씨들이 득세하였다.일찍이 홍인한은 영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죽일 때 사도세자를 비화하지 않고 영조편을 들어 사도세자를 죽게 한 인물로서 세손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런 관계로 세손에게 양위하여 대리 청정케 하는 것도 홍인한은 적극 반대한 사람이다.영조가 83세의 나이로 승하하고 세손이 정식으로 왕위에 오른 다음 정조는 홍인한과 정후겸등 사도세자의 참사 때 동조한 인물들을 모두 유배형에 처했다가 마침내는 사사하여 사도세자인 아버지의 원한을 풀었다.사도세자는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뒤주에 갇혀 죽을 때 정조는 겨우 열한 살 이었지..
조선시대 안동 김씨 일문의 세도정치가 오래 계속되어 김씨들의 세력이 점점 커지자 벼슬을 얻으려는 무리들이 김씨에게 아첨하여 돈을 주고 벼슬을 얻어 지방관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세도정치 아래서 관리들은 타락해 갔고 권세가와 줄이 닿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었고 돈 주고 관직을 사고파는 일도 흔했다일단 지방관으로 임명되면 그들이 김씨 일가에게 뇌물로 준 돈의 밑천을 뽑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백성들의 재물을 착취하였다.자기가 벼슬에 있을 때 뇌물 준 돈의 본전 뿐만 아니라 수십 배의 재물을 백성들에게 착취하였다.여기서 삼정의 문란이란 말이 나오는 데 삼정이란 전정,군정,환곡을 이야기 한다.삼정은 지방관들이 재물을 긁어 모으는 방법이어서 그 폐단을 나타내는 말이다.전정은 토지에 부과하는 세금인..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의 야마토왜가 4세기 후반에 한반도 남부 지역에 진출하여 백제·신라·가야를 지배하고 특히 가야에는 일본부라는 기관을 두어 6세기 중엽까지 일본이 직접 지배하였다는 설로 야마토왜의 ‘남선경영설(南鮮經營說)’이라고 불린다.이러한 주장은 현재 일본의 교과서에 수록되여 일본인의 한국에 대한 편견과 우월감을 조장하고 있다.일본의 역사왜곡 주장은 과거로의 환원이며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행위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고 일본인과 한국인은 본래 같은 뿌리에서 태어 났다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과 함께 표리 관계를 이루면서 35년간의 식민통치를 합리화하는 관념적 지지대로서 기능하였다.따라서 식민 사학의 극복을 논의 할 때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비판과 부정이 빼놓을 수 없는 과제임은 당연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