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와 신라가 결전을 벌인 황산벌 전투에서 나라을 위해 목수을 바친 관창은 화랑이었다.유명한 신라의 장군 김유신도 화랑이었다.신라의 내노라하는 장수들은 거의 다 화랑출신이다.화랑은 신라의 독특한 청소년 단체였다.원래 화랑은 원화에서 시작되었는데 원화는 아름다운 여성 두 명을 단장으로 삼아 만든 단체였다.그런데 원화가 된 두 여성 남모와 준정이 서로 질투를 했다.준정이 남모에게 술을 먹여 강물에 던져 버렸다.일이 탄로나서 결국 준정도 죽음을 당했다 원화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신라 진흥왕은 원화를 화랑으로 바꾸었다.원화와는 다르게 남성을 단장으로 삼았다.화랑은 ‘꽃처럼 아름다운 남자’란 뜻인데 진흥왕이 화랑을 만든 목적은 민재를 키우고 나라에 전쟁이 있을 때 군사로 쓰기 위해서 였다.그런데 화랑은 아무나 ..
묘청은 서경 출신의 승려로 그는 고려시대 당대의 권세가인 이자겸을 제거 하는데 공을 세우고 제17대 왕인 인종의 고문이 되었다.이자겸은 인종의 외할아버지이다.그런데 자기의 두 딸을 외손자인 인종과 결혼시켜 왕의 외할아버지인 동시에 장인이 된 이자겸은 세상에 두려울것이 없이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휘둘렀으나 묘청에 의하여 제거 되었다.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의 배경은 문벌 귀족들의 힘을 약화 시키려고 수도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고 묘청은 인종을 설득했다.개경은 문벌 귀족들이 판치는 곳이니 개경 떠나 서경(지금의 평양)으로 수도를 천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개경은 이미 기운이 다했으니 서경으로 가면 주변국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릴 것이라고 했다.또 중국처럼 왕을 황제라고 부르고 연도도 중국을 따라 쓰지 말고 ..
고구려가 멸망하고 그 땅에 다시 들어선 나라가 발해였다.처음에 조선시대 유학자 들은 ‘삼국-신라-고려-조선’으로 이어여 왔다고 생각해서 발해를 우리 역사에 포함하지 않았다.그런데 조선후기의 실학자 유득공은 〈발해고〉란 책을 써서 ‘남북극 시대’를 주장 했다.유득공은 발해에 대하여 우리의 역사라면서 남쪽엔 신라,북쪽엔 발해가 있었던 시기를 ‘남북국시대’라고 불렀다.발해는 소수의 고구려인이 다수의 말갈인을 다스리는 나라로 고구려인이 40%,말갈인이 약60%로 구성되었다고 한다.말갈인은 중국인들이 붙여준 이름인데 중국인들은 넓은 만주 일대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을 통틀어 말갈인 이라고 불렀다.발해가 우리 역사인 이유는 발해인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였는지 알아보면 더 분명해진다.발해의 문왕은 외국에 보내는 국..
임진강에서부터 만주에 이르는 드넓은 영토가 고구려의 것이 되었을 때 고구려를 다스리는 왕이 광개토 대왕이다. 광개토 대왕릉비는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면서 만들었다. 광개토 대왕능비는 ‘호태왕비’라고도 한다. 우리가 보통 부르는 광개토 대왕은 시호인데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을 줄여서 광개토 대왕이라고 하는데 시호는 왕이 죽은 뒤에 붙여주는 이름이다.원래 광개토 대왕의 진짜이름은 ‘담덕’이다. 광개토 대왕이 세자로 있을 때 아버지 고국양왕은 보검을 주면서 말하기를 “이 보검은 우리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왕 때부터 전해 내려온 칼이다.이 보검을 소중히 간직하여 나라를 이어갈 기량을 닦는데 조금도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하였다. 이후 세자 담덕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