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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임금의 나이가 80에 이르러 사도세자의 아들 세손이 대리청정을 하게 되었다.
이 때에 세손의 외할아버지인 홍봉한이 영의정으로 있었고 동생인 홍인한 또한 정승자리에 있어 홍씨들이 득세하였다.
일찍이 홍인한은 영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죽일 때 사도세자를 비화하지 않고 영조편을 들어 사도세자를 죽게 한 인물로서 세손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런 관계로 세손에게 양위하여 대리 청정케 하는 것도 홍인한은 적극 반대한 사람이다.
영조가 83세의 나이로 승하하고 세손이 정식으로 왕위에 오른 다음 정조는 홍인한과 정후겸등 사도세자의 참사 때 동조한 인물들을 모두 유배형에 처했다가 마침내는 사사하여 사도세자인 아버지의 원한을 풀었다.
사도세자는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뒤주에 갇혀 죽을 때 정조는 겨우 열한 살 이었지만 그후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정조는 한시도 아버지를 잊지 않았다.
아버지를 잊지 않는다는 것은 다시 말해 사도세자의 죽음이 억울한 것이었음을 밝히고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당쟁을 반드시 뿌리 뽑겠다는 결심을 했었다.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인물들을 처단하고 한 때는 정치에 의욕을 상실하여 홍국영에게 모든 정치를 일임하기도 하였으나 홍국영의 횡포가 너무 지나쳐 마침내 홍국영을 추방하고 홍씨의 세도 정치를 무너뜨렸다.
정조는 당파싸움의 피해를 잘 아는지라 영조의 탕평책을 이어 밀고 인사의 형평을 기하기 위하여 숙종이후 실각하였던 남인을 등용하고 서북인을 골고루 기용하였다.
그리고 자유로운 상행위를 허용하고 장인 등록제를 폐지하였으며 서얼과 노비에 대한 차별을 완화 하였다.
또한 초계문신 제도를 도입하여 37세이하 참상·참하의 당하관 문신 재교육제도를 실시 하여 의정부에서 1차로 뽑아 규장각에서 위탁교육시켜 40세에 졸업시키는 제도를 도입하였다.
영조는 왕권강화를 위해 규장각을 설치하고 지방통제를 강화하였으며 수원성을 축조 하였다.
정조는 원래 학문을 좋아하는 군주 였으며 서적의 편찬에 힘을 기울여 《국조보감》,《홍해전서》,법전인 《대전통편》,형조 사례모음집인 《추간지》 등을 편찬하였다.
그는 재위 24년간 오직 학문으로 세월을 보냈다.임금 자신이 태평성대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그리그 이 때는 청나라의 전성기로서 청나라의 고증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하여 새로운 학풍이 진작되었다.
양반 계급을 우선하던 정책을 버리고 일반 백성을 우선하는 정책을 써 쌀값이 오르면 국가에서 저장했던 곡식을 국민에게 나누어 주는 등 서민계급의 생활 안정에 주력한 나머지 국민들의 생활이 많이 향상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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