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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에서부터 만주에 이르는 드넓은 영토가 고구려의 것이 되었을 때 고구려를 다스리는 왕이 광개토 대왕이다.
광개토 대왕릉비는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면서 만들었다.
광개토 대왕능비는 ‘호태왕비’라고도 한다.
우리가 보통 부르는 광개토 대왕은 시호인데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을 줄여서 광개토 대왕이라고 하는데 시호는 왕이 죽은 뒤에 붙여주는 이름이다.원래 광개토 대왕의 진짜이름은 ‘담덕’이다.
광개토 대왕이 세자로 있을 때 아버지 고국양왕은 보검을 주면서 말하기를 “이 보검은 우리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왕 때부터 전해 내려온 칼이다.이 보검을 소중히 간직하여 나라를 이어갈 기량을 닦는데 조금도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하였다.
이후 세자 담덕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는데 그의 나이 18살 이었다.
그 무렵 중국은 여러 나라로 갈라져 저희들 끼리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는데 이 틈을 타서 광개토 대왕은 영토를 늘리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광개토 대왕릉비는 만주 길림성 집안현 태왕향 구화리에 세워져 있는데 거대한 천연 화강암에 4면 가득히 1,775자의 한자를 새겨 놓았다.
화강암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썼기 때문에 비석의 표면이 울퉁불퉁하다.비석의 높이는 6.4미터이고 무게는 37톤이 된다고 한다.
광개토 대왕릉비의 비문내용은 예서체로 씌어져 있으며 왕의 공적을 3부로 나누어서 기록을 하였는데 1부는 고구려의 건국 신화와 추모왕(동명왕),유류왕(유리왕),대주류왕(대무신왕) 등의 세계(世系)와 광개토 대왕의 행장(行狀)을 기록하였다.
2부에서는 광개토 대왕 때 이루어진 정복 활동과 영토관리에 대한 내용들이 연대순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3부에서는 능을 관리하는 수묘인 연호의 숫자와 차출방식,수묘인의 매매금지에 대한 규정이 기록되어 있다.
일본의 역사학자들 가운데 ‘임나일본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일본이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중엽까지 한반도 남부의 가야 지방에 진출하여 일본부를 두고 백제,신라까지 지배 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 근거로 광개토 대왕릉비의 한 구절을 들고 있다.
‘왜이신묘년래 도해파(渡海破) 백잔 ㅇㅇㅇ라이위신민’
중간에 ㅇㅇㅇ 빠진 글자와 도해파를 어떻게 해석 할 것인가에 따라 비문의 풀이가 달라지는데 광개토 왕릉비 비문의 내용을 두고 일본의 해석은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서 백제와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자기들에게 유리한 해석을 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는 아직 나라라고 부를 만한 강력한 세력이 없었고 백제와 신라는 그런 일본보다 월등히 앞서 있었기 때문에 일본 학자들의 해석은 당시의 현실과 맞지 않는다.
그래서 이 부분이 일제 강점기에 일본 사람에 의해 위조되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는 ‘임나 일본부’는 일제 시대에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 시키기 위해서 내놓은 주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광개토 왕릉비의 비석의 내용의 한국의 해석은 신묘년에 왜가 오자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백제를 격파하고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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