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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멸망하고 그 땅에 다시 들어선 나라가 발해였다.
처음에 조선시대 유학자 들은 ‘삼국-신라-고려-조선’으로 이어여 왔다고 생각해서 발해를 우리 역사에 포함하지 않았다.
그런데 조선후기의 실학자 유득공은 〈발해고〉란 책을 써서 ‘남북극 시대’를 주장 했다.유득공은 발해에 대하여 우리의 역사라면서 남쪽엔 신라,북쪽엔 발해가 있었던 시기를 ‘남북국시대’라고 불렀다.
발해는 소수의 고구려인이 다수의 말갈인을 다스리는 나라로 고구려인이 40%,말갈인이 약60%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말갈인은 중국인들이 붙여준 이름인데 중국인들은 넓은 만주 일대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을 통틀어 말갈인 이라고 불렀다.
발해가 우리 역사인 이유는 발해인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였는지 알아보면 더 분명해진다.
발해의 문왕은 외국에 보내는 국서에서도 스스로를 ‘고려 왕’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고려는 고구려를 말한다.
또 일본이 발해에 보낸 국서에는 발해 왕을 ‘고려 왕’이라고 부르고 〈속일본기〉라는 일본역사책에는 발해에서 간 사신을 고려 사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오랫동안 수수께끼로 싸여 있던 발해의 모습을 우리 앞에 보여 준 건 문왕의 두 공주 묘에서 유물과 벽화,비문들에 의해서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두 공주는 젊은 나이에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서 문왕은 딸들이 죽자 얼마나 상심했는지 정사를 돌보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문왕의 둘째딸 정혜공주 묘에서 있는 돌사자는 발해 왕실의 문화는 당나라 문화의 영향를 보여주고 넷째 딸 정효공주 묘에서는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벽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12명이었는데 커다란 저택의 문을 지키고 있는 무사,시중드는 몸종들,음악을 연주하는 악사등이 그려져 있어서 당시 발해 사람들의 모습을 알게 해주는 중요한 벽화이다.
정혜공주의 묘는 굴식돌방무덤의 모즐임천장 구조로 되어 있다.
무덤안에서 발견된 비문은 발해인들이 직접 쓴 것으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비문을 보면 발해의 한문 수준이 상당히 높았던 것을 알 수가 있는데 신라와 마찬가지로 발해에도 당나라로 공부하러 간 유학생들이 많았고 그 중에는 당나라의 빈공과에 합격한 사람이 여러 명 있었다고 한다.
발해는 불교를 숭상했고 발해의 불교는 고구려의 불교를 이어 받았다. 발해의 예술작품은 웅장하고 힘찬 기상이 흐르고 불상,석등,연꽃 무늬 기와는 아주 아름다웠다고 한다.
발해는 한때 당이 ‘해동성국’이라고 불릴정도로 부흥했다. 그러나 몽고의 초원 지대에서 일어나 동쪽으로 뻗어 온 거란은 발해의 수도 상경 용천부를 포위하고 발해의 마지막 왕인 대인선은 불과 며칠만에 항복하면서 발해는 936년에 멸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