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청은 서경 출신의 승려로 그는 고려시대 당대의 권세가인 이자겸을 제거 하는데 공을 세우고 제17대 왕인 인종의 고문이 되었다.이자겸은 인종의 외할아버지이다.그런데 자기의 두 딸을 외손자인 인종과 결혼시켜 왕의 외할아버지인 동시에 장인이 된 이자겸은 세상에 두려울것이 없이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휘둘렀으나 묘청에 의하여 제거 되었다.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의 배경은 문벌 귀족들의 힘을 약화 시키려고 수도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고 묘청은 인종을 설득했다.개경은 문벌 귀족들이 판치는 곳이니 개경 떠나 서경(지금의 평양)으로 수도를 천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개경은 이미 기운이 다했으니 서경으로 가면 주변국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릴 것이라고 했다.또 중국처럼 왕을 황제라고 부르고 연도도 중국을 따라 쓰지 말고 ..
고려 왕건이 죽은 뒤 호족들은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였다.고려초기에는 왕건의 맏아들 혜종이 2년밖에 왕위를 지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은 호족들의 힘이 강하고 왕이 매우 힘이 약했다.고려시대 왕권의 힘이 강해진 것은 제 4대 왕인 광종 때부터 였다.광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두 가지 새로운 정책을 실시했는데 하나는 노비안검법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시험제도이다.노비안검법은 호족들이 불법으로 갖고 있던 노비들을 양인으로 되돌려 주는 것이다.당시 고려시대의 신분제도를 보면 노비는 천인에 속했는데 왜 광종은 노비를 양인으로 되돌려 주었을까? 당시에는 사람의 노동력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재산이었다.그러므로 호족들에게서 노비를 빼앗는 것은 호족들의 재산을 빼앗는 것이나 다름없었다.광종의 노비안검법은 권력과 금..
고구려가 멸망하고 그 땅에 다시 들어선 나라가 발해였다.처음에 조선시대 유학자 들은 ‘삼국-신라-고려-조선’으로 이어여 왔다고 생각해서 발해를 우리 역사에 포함하지 않았다.그런데 조선후기의 실학자 유득공은 〈발해고〉란 책을 써서 ‘남북극 시대’를 주장 했다.유득공은 발해에 대하여 우리의 역사라면서 남쪽엔 신라,북쪽엔 발해가 있었던 시기를 ‘남북국시대’라고 불렀다.발해는 소수의 고구려인이 다수의 말갈인을 다스리는 나라로 고구려인이 40%,말갈인이 약60%로 구성되었다고 한다.말갈인은 중국인들이 붙여준 이름인데 중국인들은 넓은 만주 일대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을 통틀어 말갈인 이라고 불렀다.발해가 우리 역사인 이유는 발해인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였는지 알아보면 더 분명해진다.발해의 문왕은 외국에 보내는 국..
임진강에서부터 만주에 이르는 드넓은 영토가 고구려의 것이 되었을 때 고구려를 다스리는 왕이 광개토 대왕이다. 광개토 대왕릉비는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면서 만들었다. 광개토 대왕능비는 ‘호태왕비’라고도 한다. 우리가 보통 부르는 광개토 대왕은 시호인데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을 줄여서 광개토 대왕이라고 하는데 시호는 왕이 죽은 뒤에 붙여주는 이름이다.원래 광개토 대왕의 진짜이름은 ‘담덕’이다. 광개토 대왕이 세자로 있을 때 아버지 고국양왕은 보검을 주면서 말하기를 “이 보검은 우리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왕 때부터 전해 내려온 칼이다.이 보검을 소중히 간직하여 나라를 이어갈 기량을 닦는데 조금도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하였다. 이후 세자 담덕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