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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국가의 발전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민족이란 혈연과는 비교적 무관하게 우연히 같은 영토안에 살게 된 사람들로서 공통의 역사적 경험 또는 기억에 기반하여 공통의 의식인 민족의식을 발전시킨 사람들이라고 말할수 있는데 민족은 공통의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문화적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특정한 민족간에 오랫동안 계승되어온 고유한 전통문화 속에서 그들만의 고유한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노력을 해왔는데 이러한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이러한 활동들은 민족국가의 형성이 상당부분 완결된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그럼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사례를 통하여 사례가 나타나게 된 배경과 대상에 대하여 알아보자.
우리는 흔히 근대 국가를 민족국가라 부른다.국가의 구성이 민족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한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는 것이 주된 유형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때 민족이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혈연공동체와는 별 관계가 없다.
우리 민족의 민족고취를 위한 노력들 중에서 일제 강점기 나라를 구하려는 애국 계몽운동에 사례에 대하여 알아보자.
1894년 갑신정변과 독립협회 운동에 가담했던 선각자 들은 기울어가는 국권을 되살려보고자 국민의 평등권과 재산권을 보장하는 풍토를 조성하기 위한 노력과 기울어 가는 나라를 되찾으려면 먼저 백성들을 타이르고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독립협회에서는 국민평등권,국민자유권,국민참정권등 체계적이고 일원적닌 민권사상을 가지고 민중을 계몽하여 군대적인 민중운동을 발생하고자 하였다.이에 따라 민중을 기반으로 하여 국권·민권·개혁운동을 추진하여 나갔다.그러나 수구파와 열강의 압력으로 독립협회가 해체된 뒤에 일본의 이권침탈이 더 격화 되었고 수구정권의 압제 체제가 더욱 강화되었으나 그 와중에도 개화 자강계열의 민족운동은 계속되었다.그리고 보안회는 토지 약탈을 목적으로 한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 운동을 벌여 이를 저지 하는데 성공하였으며 헌정연구회는 국민의 정치의식 고취와 입헌 정체의 수립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는 바 ,일진회의 반민족적 행위를 규탄하다가 해산 당하고 말았다.
개화자강계열의 민족운동은 그 후 애국계몽운동 다시 말하면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 양성 운동으로 보다 구체적인 계획하에 전개 되었다.
이러한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한 전국 규모의 단체는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 그리고 신민회가 대표되면서 우리민족의 민족의식 고취를 위하여 노력하였다.대한 자강회는 독립협회 운동의 맥락을 이어 헌정연구회를 모체로 하고 사회 단체와 언론기관을 주축으로 창립되었으며 교육과 산업을 진흥시켜 독립의 기초를 만들 것을 목적으로 하여 월보의 간행과 연설회의 개최등을 통하여 국권 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운동을 전개 하였다.
개화자강계열의 민족운동은 국권회복을 위한 자강계몽운동으로 펼쳐 졌다.대한 자강회는 적국 각지에 지회를 설치하고 1500여명의 회원을 확보하여 활동을 하였으나 일제는 고종 황제의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고종의 양위를 강요하였고 이에 대하여 격렬한 항의 시위를 하던 대한자강회는 강제로 해산 되었다.
대한협회도 역시 대한 자강회를 계승하여 교육의 보급,산업의 개발,민권의 신장,행정의 개선 등을 위하여 국민들을 위하여 대한 자강회와 유사한 실력 양성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일제의 한국 지배권이 강화되면서 대한협회의 국권 회복에 대한 의지가 약화 되기도 하였다.따라서 국권회복운동의 정신적 계승은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로 이어졌다.
1907년 4월에 사회 각계 각층의 인사 20여 명이 서울에서 조직한 비밀결사조직 신민회는 이동녕,안창호,양기탁 등을 지도부로 구성되었다.
신민회는 국권의 회복과 공화정체의 국민 국가 수립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그러나 표면적으로는 문화적,경제적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하면서 실질적으로는 해외에 독립군 기지의 건설에 의한 군사력 양성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신민회는 일제가 뒤집어 씌운 105인 사건으로 인하여 그 조직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고 을사조약이후에 서북학회,기호응학회 등 각지역의 명칭을 딴 교육 단체들이 앞 다투어 설립되었다.
이들 학회는 교육진흥에 의한 향토의 발전과 민족의 실력 양성을 통한 국권 회복에 목표를 두고 민중의 계몽과 신교육의 보급에 온 힘을 쏟았다.
이들 학회는 명칭은 비록교육 단체라고 내걸었으나 실상은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정치와 교육을 결합시킨 구국 운동 단체로서 큰 열의와 업적이 남아 있다.또한 신문을 통해서도 애국계몽운동이 이루어 졌으며 특히 장지연이 을사조약에 분개하여 쓴 황성신문의 ‘시일야방성대곡’이 유명하다.
우리가 지닌 민족적 역량을 배양하여 국권을 회복하려는 목적에서 전개된 애국계몽운동은 우리 민족의 민족의식 고취와 독립운동 역사에 있어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국권 회복과 동시에 근대적 국민국가 수립을 목표로 내세워 당시의 민족적 과제에 충실하고 근대사의 발전 방향에 합치되는 민족운동의 새로운 이념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애국계몽 운동은 민족독립 운동의 기반을 닦았다.그들은 근대적 민족교육을 통하여 독립운도의 인재를 양성하고 근대적 민족 산업을 진흥시켜 독립운동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고자 계획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애국계몽운동도 일제에 의하여 정치적,군사적으로 예속된 보호국체제 하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에 항일 투쟁에 한계성이 있었으나 우리민족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좋은 사례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