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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시대 애국지사들의 항일 운동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었다.
김원봉을 중심으로한 의열단(만주 길림성 1919년),김구의 한인애국단(상하이1931년),김창숙의 다물단(베이징 1923년)이 대표적이다.
김구를 중심으로 한 한인애국단은 상하이 임시 정부에 속한 단체인데 대표적인 활동은 이봉창의 일본 히로이토 국왕 폭살을 기도하였고 이어 윤봉길의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의 폭탄투척이다.
1930년대 당시 일본은 만주를 손에 넣고 중국을 넘보면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김구의 백범일지에는 ‘사방을 돌아보아도 임시 정부의 사업 발전은 고사하고 이를이라도 보전할 길이 막연함을 느꼈다’고 솔직하게 썼을 정도로 당시 임시 정부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었다.
김구는 임시 정부에 생기를 불어넣고 새로운 불을 지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활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만든 단체가 ‘한인애국단’이다.
한인 애국단의 첫 번째 활동은 이봉창의거였고 두 번째 활동은 윤종길의 의거 였다.
두 사람의 의거는 국내외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는데 중국은 조선인들의 독립의지에 감탄하면서 임시 정부를 적극 도와주겠다고 약속하기도 하였다.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는 임시정부에 활기를불어 넣고 조선인의 자존심을 널리 알렸다.
한인 애국단 소속의 이봉창은 1901년 서울 원효로에서 태어 났다.윤봉길보다 일곱 살이나 위다.이봉창은 어렸을 때 집이 부유했지만 커서는 학교를 다니지 못할 정도로 가난해져서 공부를 그만두고 열다섯 살부터 돈벌이네 나썼는데 과자점 점워,약국점원,용산역 인부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살아가는 도중 좀 더 나은 일자리를 구ᄒᆞ려고 일본으로 건너 갔다.아무리 여심히 일해도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과 멸시를 받았다.일본말을 잘 했기 때문에 차별과 멸시를 피해볼려고 이봉창은 일본인 체 속이고 비누가게에 취직을 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이봉창은 ‘조선인은 조선인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거짓 삶이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일본을 떠나 중국 상하이로 임시 정부를 찾아가 김구를 만나서 독립운동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김구는 이봉창을 몇 번 만나면서 믿음직하게 여겨 일본 천왕의 암살이라는 거사를 맡긴다.
이봉창은 일본으로 출발하기전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선서를 하고 거사를 거행 하였다.
이봉창의 의거가 있은지 석 달쯤 뒤인 1932년 4월29일 일본천황의 생일인 ‘천장절’ 행사장에서 일본천황은 직접 참석하지 않았지만 일본의 높은관리,장군들이 참석한 가운데 윤봉길 의사는 도시락 폭탄을 투척하였다.
윤봉길은 1908년 충남 예산에서 파평 윤씨라는 이름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열다섯 살에 배용순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윤봉길은 좀더 큰 세사에 나가 할 일을 찾아 보자고 결심하고 가족을 고향에 둔 채 홀로 중국을 갔다.
상하이에 도착한 윤봉길은 안공근을 알게 되었는데 안공근은 안중근의 동생인데 임시 정부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안공근의 소개로 김구를 만나 이봉창이 했던 것처럼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홍커우 공원에서 의거를 일으켰다.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는 침체되어 있던 임시정부를 되살리는 밑거름이 되었는데 이에 김구는 두 젊은이를 잊지 않고 가슴에 담아 두었다가 해방이 되자마자 그 들의 유해를 찾아 1946년 고국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였으며 지금의 서울 효창공원에 두분의 유해를 모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