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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가슴 아픈 시기는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된 때이다.
을사조약이란 1905년 을사년에 일본과 강제로 맺은 조약인데 이 조약은 우리나라를 일본의 식민지로 만드는 첫 걸음이 된 조약이었다.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이라고 하는 을사조약은 일본의 정치가인 이토 히로부미와 대한제국이 맺은 조약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나중에 안중근이 쏜 총에 맞아 죽은 사람으로 일본 수상을 네 번이나 한 인물로 메이지 유신의 핵심인물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을 만나 “폐하,저희 일본 제국의 참뜻을 헤아리신다면 조선의 안년과 보호를 위해 당분간 외교권을 일본에게 맡기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승낙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폐하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그러나 만약 거부하시면 일본제국 정부는 이미 결심한 바가 있으니 그 결과가 과연 어떨지 생각 하셔야 합니다.······ 아마 조약을 맺는 것보다도 더 불리한 결과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토 히로부미의 말투는 정중했지만 내용은 협박이나 다름 없었다.조선의 외교권을 일본에게 넘기는 조약을 맺자는 협박이었다.
고종은 이토 히로부미의 협박을 거부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이튼날 일본 군대와 경찰이 궁궐 안팎과 서울 시내 곳곳에 진을 친 가운데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의 대신들을 모아 놓고 이 조약에 찬성하라고 강요 하였다.
대신들이 머뭇거리로 있을 때 이완용이 나서서 “이번 일본의 요구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오 .일본은 지금까지 청·일,러·일 두 차례의 전쟁에서 많은 희생을 치르고도 조선을 지키는데 도움을 주었소.또한 지금까지 경험으로 보아 갈팡질팡하는 조선의 외교는 동양 평화를 어지럽힐 뿐만 아니라 조선 자체를 위기에 빠지게 했소.상황이 이러하니 일본이 이 조약을 체결하고자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오.”라고 말하였다.
이완용이 조선의 대신인지 일본의 대신인지 알수 없는 발언에 참정대신 한규설은 극렬하게 반대 하였으나 이토 히로부미는 화를 내면서 을사조약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고 을사조약을 하지 않으면 일본 천황이 가만있지 않을 거라고 협박하였다.
결국 외부 대신 박제순,내부 대신 이지용,학부 대신 이완용,군부 대신 이근택이 찬성하였고 참정대신 한규설,탁지부 대신 민영기는 반대하였다.그리고 공부 대신 권중현은 반대하다가 결국찬성하였다.
그러자 이토 히로부미는 외부 대신 박제순의 도장을 빼앗아 조약 문서에 찍었다.원래 고종의 승낙 없이는 어느 누구도 함부로 도장을 찍을 수 없게 되었지만 을사조약은 이러한 절차를 무시하고 강제로 조약이 체결되었다.
을사조약의 핵심내용은 대한 제국은 일본의 허락 없이는 어떤 나라와도 조약을 맺지 못하며 일본이 대한 제국의 외교를 맡아서 처리 한다는 내용이었다.
을사조약이후 조약을 폐기하여야 한다는 상소가 전국적으로 일어났고 나철·오기호는 을사조약에 찬성한 5적 암살단을 조직하였으며 전국에서 이 조약에 반대하는 의병들이 항전이 이어졌다.
을사조약의 주역인 일본 핵심인물 이토 히로부미는 안중근의 거사에 의하여 1909년 만주 하얼빈 역에서 사살되었다.
을사조약 이후 1907년에는 군대가 해산되어 군사권이 박탈되고 1909년 7월 사법권이 박탈되고 1910년 6월에는 경찰권 마저 일본에 이양하게 되면서 그해 8월에 국권이 일본에게 박탈되는 경술국치로 일본의 36년간의 식민지로 이어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