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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관파천은 국가의 상징인 왕이 러시아 공사관 밀실로 간 역사적으로 수치스러운 일이었는데 왕의 근거리에서 보좌했던 상궁이 엄상궁이다.
명성왕후 시해사건인 을미사변으로 인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나고 정국이 혼란한 상황에서 고종은 상당히 불안해 하였다.
러시아 웨베르 공사와 기회를 노리고 있던 친러파 이범진 등은 새벽에 국왕과 세자를 여성용교자에 숨겨 엄상궁의 도움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들어 갔다.
러시아의 웨베르 공사와 공사관을 보호 한다는 구실로 수병 백명을 서울로 데려왔다.
왕의 아관파천은 을미사변으로 명성왕후가 시해되자 정식으로 왕을 모실 사람이 없으므로 자연 지근 거리에 있던 상궁이 왕의 좌우에서 시중을 들게 되었다.이때 지밀(至密) 상궁은 엄상궁으로서 그의 출신은 미천하였으나 궁중에 들어와 고종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엄상궁도 명성왕후가 생존했을 때에는 한때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으나 명성왕후가 피살된 후 부터는 왕비나 다름없이 위세를 부리면 왕을 좌우에서 모시게 되었다.
명성왕후가 살해된 후 왕의 심정은 불안하였고 일본 잔당들이 어느 때 또 나타나 자기에게 무슨 해를 입힐지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 속에서 왕의 심정을 꿰뚫어 본 엄상궁이 잠시 몸을 피하자는 제의를 하니 왕은 즉시 실행에 옮겨서 러시아 공사관 지하 밀실로 들어갔던 것이다.
왕의 일행이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하자 대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친러파들이 왕을 옹호하여 들어가려 하자 러시아 공사는 왕과 세자만을 들여보내고 다른 사람들은 접근도 못하게 제지 하였으니 왕은 완전히 감금 상태가 되고 말았다.
아관파천이후 왕을 배알하기 위해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러시아 공사의 승인을 받아야 했으며 오직 통역 김홍륙만이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
아관파천이후 정치는 하루아침에 친러파의 손으로 넘어가고 지금까지 정권을 잡았던 친일세력의 총리대신 김홍집과 상공대신 정병하는 역적의 죄명으로 경복궁 앞에서 군중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고 유길준, 권영진 등의 친일파는 일본으로 망명하기에 이르렀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있으므로 러시아의 조선에 대한 이권을 가지고 농락하였다
탁지부 고문인 알렉세프는 마치 재무부 장관처럼 경인철도 부설권은 미국인 모어스에게,경의선은 프랑스 사람 그릴르에게 넘겨주고,함경도 광업권은 러시아 사람 니시첸스키에게,압록강 유역의 벌채권은 러시아의 푸리넬에게 나누어 주었다.
우리 국민은 이러한 러시아의 행태와 고종의 아관파천 사태에 대하여 맹렬히 비난하였고 독립협회는 왕의 환궁과 이권양도 반대 운동에 앞장섰다.이로 인하여 결국 고종 1897년 왕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하여 국호를 제국 연호를 광무라 하고 왕을 황제라 칭하고 자주 국가임을 선포하여 대한제국이라 하였다.
대한제국 성립되었지만 집권층의 보수적 성향과 열강의 간섭으로 광무개혁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진보적 정치 개혁 운동을 탄압하여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